한반도 역사상 최강의 총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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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여행자87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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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일제군경 1000여명의 포위속에서 16명을 사살하고 마지막 남은 한발의 총알로 순국했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34세였다.
그는 처음부터 타고난 총잡이였었을까?
1889년 구한말 군관을 지낸 아버지 김귀현과 어머니 김점순 슬하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다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14살의 어린나이부터 철공장에서 일을하며 돈을 벌었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니며 홀어머니와 살아가던 매우 평범한 청년이었다.
1910년에는 경성영어학교를 다니며 국제정세와 서양문화에 대한 안목을 넓히기도 하고
1912년에는 철물점을 개업해 가게를 운영 하게 되었고
1913년에는 짝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사업수완이 좋아 그가 경영하던 철물점은 직원 50명을 거느리던 규모가 상당한 철공소로 발돋움했고
김상옥의 철공소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동시에 경성에 머무는 독립운동가들의 비밀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주던 그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 사건이 있었다.
바로 1919년 3월 1일부터 있었던 만세운동.
당시 그는 태극기를 대량제조해 배포하였으며
철공소 직원 50여명과 함께 거리에 나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 의해 무참하게 유린당하던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맨몸으로 달려들어 그 헌병의 장검을 빼앗아 제압하고 그 여학생을 구출하게 되는데
이때의 일을 계기로 그는 독립운동에 직접 투신하게 된다.
철공소 운영으로 모은 자금으로 지하신문사를 발간해 독립사상을 계몽하고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고관 및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기도해
여러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조선헌병대분소를 습격해 장총과 군도 등을 탈취하기도 했다. 사격술은 이시기에 익힌것으로 알려진다
1920년에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기위한 계획을 짜던중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동지들이 붙잡히게 되었고
단독으로 계획을 실행하려다 상황이 여의치않았고 지명수배가 되어 더이상 국내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어쩔수없이 그는 상하이로 망명을 하게 된다.
상하이에서 김구와 만나게 되고 그길로 그는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 등과 논의해 조선총독 암살 및 주요관공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짜기 시작하고
1923년 1월, 마침내 그 계획을 실행하기위해 상하이를 떠나 경성으로 향했다.
권총 4정과 실탄 수백발, 그리고 수제폭탄을 손에 쥐고서..
농부로 변장해 압록강철교에서 국경 경찰을 사살하고
신의주에서는 세관검문소 세관원들을 제압하여 국내잡임에 성공했다.
이후 경성에 진입한 그는 거사 계획을 다시금 점검하게 되는데
상하이에서 임정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던 상하이 주재 일본제국경찰의 연락으로 경성의 일본경찰들이 경계를 강화하자 총독암살 계획의 시일이 계속 미뤄지게 된다.
더이상 계획을 미룰수 없었던 상황속에 김상옥은 결국 주요관공서 파괴의 임무를 우선하여 수행하게 되고
그렇게 그가 향한곳은 바로 종로경찰서.
당시 종로경찰서는 일제탄압의 상징이었으며 그곳에서 고문당해 죽어나간 독립운동가만 셀수가 없었고
대한의 국민들의 한이 가장 서린곳이었다.
1923년 1월 12일 밤, 그의 손에 쥐어진 터질지 안터질지 모르는 수제폭탄이 종로경찰서에 던져졌고
다행히도 폭탄은 제대로 터지게 된다. 여러 경찰들이 중경상을 입고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건물도 상당히 파손되었다.
김상옥은 그대로 현장에서 벗어나 매부 고봉근의 집에 숨게되는데
일본경찰들은 이 의거의 실행범을 잡기위해 총력으로 수사를 하지만 실마리를 잡지 못하던중
고봉근의 행랑방에 있던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면서 의거의 장본인인 김상옥의 존재와 그의 은거지가 탄로나게 되었고
약 20명의 무장경찰의 포위 속에서 김상옥은 권총 두자루를 들고 그들에게 맞서게되는데
1명을 사살하고 여러명의 경찰들에게 중상을 입힌후 가옥들의 옥상들을 넘고 넘어 산으로 도주하는데
일본경찰은 헌병의 지원을 받아 김상옥이 도주한 산을 수백명의 병력으로 포위했지만
그는 그 산에 있는 절에서 스님에게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해 산을 내려와 빠져나오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 그는 한겨울 산속 도주중 입은 동상을 치료하면서 향후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상하이로부터 김상옥에게 서신을 전해주러오던 동지를 붙잡은 일본경찰이 고문하여 그에게서 마지막 은신처를 알아냈고
그의 범상치 않은 무력에 일제는 경성시내 모든 경찰서의 병력을 끌어모아
무장경관 약 400명이 은신처를 포위하고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여
절대 빠져나갈수 없도록 조치한후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김상옥은 완전무장을 마친후 방안 벽장에 숨게 되는데
은신처를 수색하던 구리다 경부가 방으로 들어와 벽장문을 열어젖히자 김상옥은 그를 가장 먼저 쏴죽였고
그대로 벽을 뚫고나가 옆집으로 피신하지만 깜짝놀란 옆집 집주인이 비명을 지르고 저항하자 다시 담을 넘어 다른 집으로 이동했고
이후 그곳의 담벼락에서 3시간 반동안 총격전을 벌이며 십수명을 사살한후 총알이 모두 떨어지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지막 남은 총알 하나로 자결해 순국하게 된다.
이때의 포위광경을 목격한 어느 서양화가가 자신의 시화집에 그때 목격한 장면을 시화집에 남기기도 하였다.
서울의 마로니에 공원에는 김상옥의사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사후에 그는 경성에서의 전설적인 시가전이 회자되며 "경성 피스톨"로 불렸지만 생전에는 그의 의협심과 무력에 "동대문 홍길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2023년 1월, 우정사업본부에서 김상옥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우표를 발행했다고도 한다.
영화 암살의 주인공 상하이피스톨 하정우가 그를 모티브로 하여 창작된 가상의 인물이고
영화 밀정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박희순이 맡은 역할이 바로 김상옥 의사이다.
순국 당시 일화에서 일본제국경찰들이 김상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김상옥의사가 마지막총알로 자결한 후에도 양손에 권총을 꼭 쥐고 놓지 않고있자
멀리서 이 모습을 보고있던 수백명의 제국 경찰들은 혹시나 살아있을까봐 두려워 도저히 다가갈수 없었고,
그의 홀어머니를 끌고와서 직접 생사를 확인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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